22연승 신화 불사조 박철순(1982)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의 한국시리즈 영웅, 그리고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불사조로 거듭난 박철순. 그의 재기를 향한 인내와 근성은 뚝심의 두산 베어스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계약 그리고 OB의 창단 멤버로
배명고-연세대를 거친 박철순은 1979년 한미 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하게 된다. 밀워키에 입단한 박철순은 피나는 노력 끝에 한국인 최초로 트리플A까지 오른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이 확정됐고 두산의 박용민 회장은 잠시 귀국한 박철순을 설득하여 한국행을 타진하게 된다. 결국 박철순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계약금 2,000만 원과 연봉 2,400만원의 특급대우로 국내 복귀를 하게 된다. (당시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1,215만원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을 정복하다
자신의 프로데뷔 첫 경기를 4안타 2실점(1자책)으로 완투하며 역시 박철순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는 이어 던진 2경기에서는 내리 지며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받기도 했으나 초반 부진은 그를 더 단단히 해 주었고 4월 10일 해태 전에서 구원승을 챙기는 것으로 시작해서 차원이 다른 경기운영 능력과 속구 그리고 스크루볼을 앞세워 9월 18일 롯데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30경기에 등판, 22연승을 거두며 리그를 지배한다. 특히 전반기에만 18승을 기록하여 OB의 전기리그 29승 중 62%를 책임지며 전기리그 우승의 1등 공신이 되었고 1982시즌 13완투승 포함 24승, 방어율 1.84, 승률 0.857을 기록, 투수부문 3관왕을 달성하며 프로 원년 MVP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1982년은 80경기가 열린 해였고 3.3경기마다 승수를 세운 그의 기록을 이듬해 100경기로 환산하면 장명부의 기록과 같은 30승이 나올 만큼 그는 팀의 대들보와 같은 존재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2세이브를 거두며 팀의 우승을 견인하며 프로 원년 챔피언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부상의 긴 터널 그리고 불사조
프로 원년 너무 무리를 해서일까, 박철순은 이듬해 전지훈련에서 원래 좋지 않았던 허리를 다쳐 83년 시즌 막바지가 되어서야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MBC와의 경기에서 송영운의 타구에 맞아 결국 들것에 실려나가게 되고 이때의 부상으로 84시즌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부상을 이겨내고 1985년 1승 4패를 기록하며 그라운드에 다시 나타났으나 시즌 막판 또다시 허리통증으로 그는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그렇게 부상이 연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86년 5승과 87년 2승을 거두며 ‘불사조’라는 칭호를 받고 그라운드에 나섰다.
계속적인 허리 치료를 받던 1988년 시즌 전 3월 박철순은 CF 촬영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서른넷이라는 나이, 그리고 지병인 허리디스크. 어느 누구도 박철순의 복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박철순은 끊임없이 재활에 매달렸고 결국 1989년 6월 1일 약 2년 만에 감격적인 첫 승을 거두고 자신의 이름 앞에 불사조라는 닉네임을 더욱 굳건히 만든다.
이후 1990년 7월 5일 해태와의 경기에서 스코어 5-0으로 1,500일 만에 눈물의 완봉승을 거두면서 4승을 따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 했고 그는 이미 연소해 버린 어깨와 아픈 몸 때문에 크게 키킹을 하고 원심력으로 공을 던져 가며 1991년에서 1994년까지 3년 동안 성치 않은 몸으로 매년 7승씩을 따내며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였다.
82년도 22연승보다 더 값진 1995년도의 9승
1994시즌 초유의 선수단 이탈로 7위를 한 OB는 창단 이래 최악의 위기에 놓였고 95시즌을 앞두고 대부분의 전문가들 또한 OB가 좋지 않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을 한다. 하지만 박철순은 팀을 하나로 묶어 불혹의 나이에 전천후로 등판하며 타자를 압도하는 구위로 82년도에 22연승 거둔 것보다 더 값진 9승을 기록하여 OB가 한국시리즈로 직행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82년도 이후 1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등판하며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직후 선수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OB팬뿐 아니라 모든 야구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불멸의 불사조 박철순
이후 아쉬움을 뒤로한 채 1997년 4월 29일 박철순은 LG와의 경기에서 그가 그토록 사랑했고 아끼던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눈물의 은퇴식을 하게 된다.
“나는 공을 던진 것이 아니라 희망을 던진 것이다.”
그의 이 말처럼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때쯤 이를 악물고 다시 나타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선수생활을 했고 비록 통산 승수가 76승에 불과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가슴속이 아련한 이유는 고난을 이겨내고 마운드에 올라서는 그의 도전정신 때문이 아닐까.
그의 자랑스러운 백넘버 21번은 영구결번이 되어 지금도 잠실구장 상단에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으며 지금의 뚝심이라는 두산 팀컬러의 밑바탕에는 박철순의 불사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저는 마운드를 떠나지만 언제나 여러분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 박철순 은퇴사 中
참조: 불멸의 30승 신화의 주인공 슈퍼 너구리 장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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