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4승에 빛나는 갈매기의 전설 최동원(1984)
최고의 하드웨어와 실력을 겸비했던 불세출의 최동원, 활약했던 시대를 두고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인물을 꼽자면 그를 선택하고 싶다.
불세출의 최동원, 아마를 평정하다
경남고 2학년 때 최강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동시대 투수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갖춘 고교 최대어로 손꼽혔던 최동원은 이듬해 청룡기 대회에서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솎아내며 고교야구 탈삼진 기록을 세우는 등 경남고의 5승 중 4승을 모두 완투승(2완봉승 포함)으로 장식, 37이닝 동안 56탈삼진, 방어율 0.24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며 팀을 우승시킨다.
이후 국제대회, 연세대 그리고 실업 롯데에서도 그의 진가는 계속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최동원 하면 1984년 한국시리즈만을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그는 1981년 실업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철완을 과시한다. 5선 3선승제의 실업야구 한국시리즈 경리단과의 대결에서 1차전 상대는 상대팀 에이스 김시진. 둘은 불꽃 튀는 완투대결을 했고 결과는 3 대 0 김시진의 승리. 그리고 2차전, 팀이 기울어지자 최동원은 또다시 구원 등판하지만 팀은 패배, 롯데는 먼저 2패를 끌어안으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그리고 3차전, 롯데는 최동원이 이닝을 던졌지만 결과는 무승부. 체력이 소진되어 과연 던질 수 있겠는가 싶었지만 그는 4차전에서도 선발등판했고 그의 호투 속에 팀은 기다리던 첫 승을 거둔다. 이어 최동원은 5차전에서도 선발 강만식에 이어 뒷문을 책임지며 시리즈는 2승 2패 1무 호각세를 이루게 되고 무승부로 마지막 경기가 된 6차전, 최동원은 9회까지 완투를 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사상 유례가 없는 연투 속에 팀이 시리즈에서 치른 55이닝 동안 완투 2번을 포함해서 6경기를 모두 등판하며 42와 2/3이닝을 투구, 탈삼진은 37개를 솎아내는 괴력 속에 자신의 힘으로 팀을 우승까지 이끈다.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그리고 롯데 입단
아마시절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한 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영입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병역문제 때문에 끝내 좌절됐고 그는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나선다. 하지만 1981년도의 무리한 등판은 아무리 최동원이라 할지라도 정상일 리가 없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롯데에 입단,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1983년 입단 첫해 208과 2/3이닝(5위) 9승(10위) 16패 148탈삼진(4위)의 성적을 거둔다.
최하위였던 팀, 그리고 팀 방어율과 팀 타율 꼴찌, 최다 실책 팀에서 ‘당연히 부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최동원이기에 한물갔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1983년도 30승의 다승왕이었던 장명부와의 맞대결에서 2번의 완투 대결을 펼쳐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항상 강한 상대를 만나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그의 모습에 팬들은 더욱 열광했는지도 모른다.
1984년 전설로 거듭나다
그리고 이어진 1984년, 그는 절치부심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고 시즌에 임한다. 전기리그 9승 7패로 전년도 승수를 채운 최동원이었지만 소속팀 롯데는 4위를 기록하며 크게 성적이 개선되지 못했다. 이어진 후반기,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색다른 구상을 하게 된다. 최동원이 모든 경기를 완투할 수는 없는 터, 그래서 다른 투수를 선발로 내세우고 이기고 있는 경기는 최동원을 투입해 승리를 거둔다는 당시로서는 용인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짜게 된다. 결국 최동원은 후반기 50경기 중 30경기에 등판하는 괴력을 보이며 284와 2/3이닝(1위) 동안 27승(1위)과 223(1위)탈삼진을 거두며 팀을 후기리그 우승으로 견인한다.
그가 솎아낸 223개의 탈삼진은 아직까지 역대 최다로 남아 있고 27승과 284와 2/3이닝은 역대 2위를 마크하고 있다. 이 중 역대 1위인 장명부의 경우 30승은 당시 30승을 약조로 보너스로 받기로 한 1억 때문에 이기고 있을 때 구원 등판해서 일부러 동점을 주고 챙긴 승수까지 합한다고 한다면 최동원의 27승 또한 못지않은 대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진 한국시리즈 회의에서 강병철 감독은 에이스 최동원을 1, 3, 5, 7차전에 투입한다고 밝혔고 이에 최동원은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이면서 너무도 무모하지만 거룩한 도전을 하게 된다.
불멸의 한국시리즈 4승, 팬들은 그의 불타는 투지를 기억한다
한국시리즈 1차전 최동원은 완봉승을 거두며 팀을 4대0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2차전은 최동원의 부재 속에 삼성의 승리, 3차전은 삼성선발타자 전원 탈삼진의 위력투를 보인 최동원이 다시 완투를 하며 롯데의 승, 4차전은 삼성이 승리를 거둔다.
2승 2패로 호각세를 보인 상황에서의 5차전, 최동원은 대타 정현발에게 통한의 역전 홈런을 헌납하며 3실점 끝에 3패를 당하며 분위기는 삼성 쪽으로 쏠리게 된다. 이어 열린 6차전에서 롯데는 선발 임호균에 이어 다시 최동원 카드를 들었고 그는 기대에 부응하며 5이닝을 철저히 틀어막으며 3승째를 거둔다. 그리고 마지막 7차전, 설마 했던 최동원은 다시 롯데의 선발로 나섰고 초반 실점을 했지만 유두열의 기적 같은 3점 홈런으로 전세를 뒤집게 된다. 그리고 최동원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으며 가을의 기적을 이룬다.
2000년 초반에서 중반 롯데가 최하위로 쳐졌을 당시 롯데 팬들이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팬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현수막을 걸고 선수들의 근성과 투지를 강조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최동원이 불사른 무모할 정도의 근성과 투지에 대한 향수와 상실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닐까.
그의 열정은 기억으로 남고…
1985년 그는 2년 연속으로 20승 고지에 오르며 팀의 대들보 역할을 했고 1986년 초반 좋은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막판 부진으로 전무후무한 3년 연속 20승에 1승이 부족한 19승을 거두지만 2년 연속으로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1987년 전년도보다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기점으로 선수협 파동의 여파로 삼성에 트레이드된 뒤 100승만을 급급히 채우고 롯데가 아니라면 뛸 이유가 없었던 그는 아쉽게도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선발투수의 필수요건 중 하나는 이닝 소화능력이다. 보통 200이닝 이상은 이닝이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록이긴 하면서도 항간에는 혹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고교 때부터 지나치게 혹사를 당하면서도 초인적인 힘으로 묵묵히 특급 에이스의 기량을 펼쳤기에 혹사라는 단어조차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고 그의 투지는 5년 연속 200이닝 투구라는 대기록으로 남았다. 그가 활약했던 1983년에서 1987년은 시즌 경기 수가 100경기에서 110경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126경기에서 133경기를 치르면서 같은 기록을 올린 정민태보다 더 힘든 여건에서 대기록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선동열조차 200이닝 이상 투구는 2회에 불과하듯이 이 기록 또한 철저한 투수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깨지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역대 완투 2위에 오른 최동원은 비록 2위이긴 하나 본인이 선발로 나선 124번의 경기에서 80번을 홀로 책임지며 역대 최고인 65%의 선발경기 대비 완투율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선발승으로 올린 56승 중 93%인 52승을 완투하며 자신이 선발로 나서서 이기는 경기는 초인적인 힘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최동원, 그 아련한 이름 석 자
보통 많은 이들은 마지막 한 경기가 남아 있는 경우는 선동열, 그리고 한 시즌을 맡기려면 최동원이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 이처럼 그는 넘치는 투지와 근성 그리고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승부욕으로 한 시대의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가장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능력으로 시즌을 지배한 사나이. 뭐라 형용하기 힘든 그의 거룩한 업적 앞에서는 평가조차 조심스러워지지만 그래도 여운이 남는 것은 실력과 더불어 고등학교 때부터 쉴 틈 없었던 그의 어깨, 그리고 사나이의 투지로 그라운드에서 완전 연소하는 그의 불타는 열정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생각해 본다.
팬들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했던 에이스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두고, 하늘은 그에게 신의 능력을 주었지만 신체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능력을 지속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하늘은 최동원에게 신의 능력과 신의 신체까지 아낌없이 주었다. 다만 시대를 잘못 부여했다. 그래서 그를 떠올릴 때면 가장 강한 임팩트와 더불어 강한 아쉬움과 여운이 남곤 한다. 그가 메이저리그에만 갔더라면, 아니 딱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참조 : 22연승 신화 불사조 박철순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