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은 ‘인간승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가 아닐까? 연습생에서 최고가 되기까지 노력과 근성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는 것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힌 그의 손이 말해 준다.
연봉 300만 원의 연습생
1986년 청주의 세광고를 졸업한 장종훈은 연봉 300만 원에 연습생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당시 세광고는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날리는 고교가 아니어서 장종훈은 프로 지명은커녕 대학 진학도 힘든 상황이었으나 마침 충청지역을 연고로 하는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하여 선수수급 차원에서 장종훈은 힘겹게 프로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1년 간 2군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장종훈은 방출대상으로 분류되면서 선수생활의 기로에 놓였다. 하지만 그가 쏟은 열정과 노력을 안 배성서 감독의 배려 덕에 연습생에서 정식선수로 등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 주전이었던 이광길의 부상으로 주전의 기회를 잡고 94경기를 뛰면서 타율 0.270에 홈런 8개(15위)를 치며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이듬해에는 정규타석을 채우고 홈런 12개(10위)를 치며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의 영광을 누리게 되고 이때부터 장종훈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연습생 신화‘라는 말이 붙기 시작한다. 또한 1989에는 18홈런으로 4위에 오르더니 1990년에는 만 22세 최연소, 그리고 고졸로서는 최초로 홈런 28개와 91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1위를 석권하며 한국 최고의 거포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김봉연(2회), 이만수(3회), 김성한(3회), 김성래(1회) 이후 새로운 인물이 홈런 타이틀을 차지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충격과 신선함을 전해 주었다.
터닝 포인트 그리고 잠재력 폭발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으로 최고의 타자가 되었지만 부족했던 유격수 수비는 그의 옥의 티였다. 결국 1991년 빙그레 코칭스태프는 그가 타격에 집중하고 타격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로 전향을 시켰고 그 결과 장종훈은 잠재력을 터뜨렸다. 1991년 그는 자신의 백넘버와 같은 홈런 35개와 타점 114타점으로 역대 최다 홈런이었던 김성한의 기록(30개)을 갈아치웠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최다 타점 기록 또한 무려 23점이나 끌어올렸으며 여기에 도루 21개로 20-20클럽 가입과 더불어 최다 안타, 장타율, 득점에서도 1위를 기록하며 MVP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습생의 신분에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가 되는 순간이었다.
거침없는 그의 질주는 1992년에도 계속되었고 마의 영역이라고 생각되었던 40홈런 벽을 깨뜨리며 홈런 41개와 119타점을 기록, 3년 연속으로 자신의 기록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홈런왕과 타점왕을 기록하며 2년 연속 MVP에 오른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
1986년도에 창단한 빙그레는 창단하던 해와 그 이듬해 7위와 6위를 기록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원년 우승 감독인 김영덕 감독을 영입한 1988년 이후부터는 정규리그 1위 2번을 포함해서 5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에 오르는 강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상군과 한희민으로 시작해서 송진우, 한용덕 그리고 정민철 등 투수진의 활약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역할이 컸고 그 중심에는 4번 타자 장종훈이 있었다.
1992년 빙그레 타선은 146개의 홈런을 양산하며 역대 최다 팀홈런 기록을 세우고 강력한 타선의 활약 속에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다. 특히 장종훈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의 이름을 본딴 『4번타자 왕종훈』이란 만화책이 나왔고 베스트셀러 만화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애증의 1989 한국시리즈 그리고 10년 뒤…
빙그레-한화 팬이라면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빨간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의 유니폼만 봐도 치를 떨 만큼 빙그레는 유독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무참히 무너졌다. 1988년 창단 3년 만에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격파하고 만난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무너진 빙그레는 이듬해 정규리그 1위의 기염을 토하며 우승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도 1차전 선동열을 무너뜨리며 첫 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한껏 높였으나 2차전 장종훈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역전패를 당한 뒤 페이스를 잃으며 내리 4경기를 내줘 2년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문다. 그리고 최강의 타선을 구축한 1992년 다시 정규리그 1위로 대권을 노렸으나 박동희의 강속구와 상승세를 탄 롯데의 근성에 밀려 다시 준우승에 그치고 타자로서 모든 것을 이룬 장종훈의 가슴속에는 1989년 결정적인 실책의 아픔과 더불어 우승의 열망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으로 무너졌던 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10년이 지난 1999년 소속팀 한화는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상대는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울렸던 롯데였다.
우승의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독수리 군단은 삼성과의 7차전 연장까지 가는 혈전 끝에 올라온 롯데를 상대로 송진우-정민철-구대성 트로이카를 앞세워 시리즈 전적 4-1로 꿈에도 그리던 우승을 했고 특히 장종훈은 5차전에서 1대 1로 팽팽했던 9회 결승 희생타점을 올리며 1989년의 한과 더불어 우승의 한을 눈물로 승화시켰다.
연습생 신화 그리고 연습벌레
몇몇 대학이 그에게 명예 대학졸업장 등의 학위를 제시했지만 장종훈은 자신을 우러러보는 고졸자들을 위해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할 만큼 그는 화려한 천재가 아닌 노력하는 이들을 생각했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선수보다는 장종훈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끊임없는 노력과 근성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가며 최고의 자리까지 한 계단씩 오르는 선수가 훨씬 드라마틱하다. 누구에게나 노력만 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 준 장종훈이야말로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만한 영웅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20년의 프로생활 동안 그가 세운 최다 출장, 최다 홈런, 최다 타점 등의 기록은 후배인 전준호화 양준혁 등에 의해 깨지고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홈런하면 통산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인 행크 아론보다는 베이브 루스가 먼저 생각나듯 그의 이름 석 자와 더불어 영구결번이 된 백넘버 35번은 영원히 팬들의 가슴속에 기억될 것이다.
“20년 전 프로야구에 첫발을 내딛던 연습생의 마음처럼 이제는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그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팬 여러분께서 저에게 보내 주신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팬 여러분께서 보내 주셨던 과분한 사랑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종훈 은퇴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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