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Korean Base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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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장 전경

원조 괴물타자 양준혁

 

‘방망이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을 친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타자 양준혁. 한국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인 그는 2010년 6월 3일 역대 최다 출장기록을 세움으로써 도루와 3루타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통산기록을 세워 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그가 예전의 이만수 이후 가장 화려한 9회 말 2아웃을 연출하리라 기대해 본다.

 

대구 그리고 삼성을 사랑한 의리의 사나이 양준혁

대구상고 시절 동기생인 좌투수 김태한과 함께 삼성에서 뛰자고 약속했던 양준혁은 1992년 삼성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삼성의 투수진은 타선에 비해서 빈약했을 뿐더러 성준을 제외하고 마땅한 좌완이 없는 터라 당연히 대구상고 동기였던 좌완 김태한에게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성과의 연습경기에서 양준혁은 영남대의 유니폼을 입고 괴물 같은 타격을 선보여 삼성 코칭스태프 및 관계자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김태한과 양준혁이라는 거물 신인을 모두 잡고 싶었던 삼성과 반드시 삼성에 입단하고픈 양준혁과 김태한의 결심이 맞물리게 되는데 한편 신체검사에서는 김태한은 현역 판정을, 양준혁은 방위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시에는 신인 지명의 보유권이 1년이어서 방위 판정을 받았던 양준혁이 상무에 입단하고 이듬해 삼성에 입단한다면 현역의 김태한보다 삼성의 입장에서는 훨씬 경제적인 지명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결국 삼성은 김태한을 지명했고 양준혁은 이듬해 지명을 받기 위해 타구단의 백지수표와 아파트 제공을 미끼로 한 지명을 마다한 채 상무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항간에는 삼성이 양준혁에게 1억 원을 선지급해 주고 아파트까지 제공해 줬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는 해태와의 트레이드 당시 기자회견에서 100만 원 가량의 보조금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처럼 눈앞의 부를 마다하고 삼성에 간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대구상고 동기이자 단짝이었던 김태한과 둘 중 한 명만이 삼성에 선택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이가 상무에 가서 삼성에서 꼭 같이 뛰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 대신 사나이의 의리를 택한 양준혁은 상무로 입대를 한 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정교한 타격에 파워를 가미시켰고 1992년 대통령배 실업추계리그에서 홈런상을 기록한다. 결국 양준혁은 1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삼성 라이온즈에 최고 계약금을 받으며 입단하게 된다.

 

전설의 시작 1993년

우여곡절 끝에 역대 타자 최고액이었던 계약금 1억 100만 원과 연봉 1,800만 원에 삼성 라이온즈로 입단한 양준혁은 데뷔전인 4월 10일 쌍방울과의 경기 첫 타석에서 임창식으로부터 우월 2루타를 치는 등 데뷔 첫 경기부터 3안타를 기록하는 무서운 활약을 보이며 전설의 서막을 울린다. 이후 4월 20일 해태전에서 본인의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치는 등 1년 간의 상무 생활로 인해 늦어진 프로생활에 분풀이라도 하듯 그의 방망이는 불을 뿜었고 대구상고 시절 동기생 김태한과 꼭 삼성 라이온즈에서 맹활약을 하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며 둘은 투타에서 삼성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각되었다.

원조 괴물타자 양준혁, 안타치는 모습

대형 신인들이 배출됐던 1993년

1993년은 한국 야구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대형급 신인들이 다수 입단했던 해이기도 하다.

삼성에서는 신인왕을 차지한 양준혁을 비롯해서 정규시즌서 14승을 거둔 후 한국시리즈에서 문희수-선동열-송유석을 상대로 불멸의 15이닝 완투 쇼를 한 박충식, 비록 데뷔 해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한국 야구의 한 획을 그은 김현욱이 있었다. 그리고 해태에서는 한국시리즈 MVP 이종범과 고졸로 10승을 거둔 이대진이 입단했고 LG에서는 ‘야생마’ 이상훈이 입단해 9승을 거두었다. OB는 당시 최대어였던 추성건과 95년도 우승을 이끈 이도형, 9승 23세이브를 비롯해서 방어율 1.11로 선동열에 이어 2위를 거두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김경원이 활약했다. 빙그레는 비록 입단 해에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발돋움한 구대성과 고교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노장진이 입단했고 태평양에서는 좌완 김홍집 그리고 쌍방울에서는 ‘철인’ 최태원과 성영재가 입단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들이 1993년도에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이종범, 박충식, 김경원은 신인왕을 줘도 무방할 정도의 맹활약을 했지만 양준혁의 MVP급 활약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극심한 투고타저 속에 빛난 신인 양준혁

여기서 양준혁의 신인 때의 활약이 대단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1993년도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극심한 투고타저의 해였다는 것에 있다.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93년은 28년 야구 역사상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한 해이고 3할 이상의 타자가 7명 그리고 20개 이상 홈런은 양준혁과 당시 MVP이었던 김성래만 기록했었다. 또한 1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상훈(LG)이 10위에 오를 정도였던 반면에 리그 방어율은 1982년 다음으로 뛰어난 3.27을 기록했고 두 자리 수 승수를 기록한 투수 또한 23명에 이를 정도로 우수한 투수들이 타자를 제압했던 해였다.

이런 와중에 양준혁의 성적은 놀라움을 넘어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타율, 출루율, 타율, OPS에서 1위를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은 리그 MVP의 김성래에 이어 2위, 득점 역시 이종범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최다 안타는 5위를 기록함으로써 도루를 제외한 공격부분의 모든 타이틀에서 선두 혹은 선두권을 기록하게 된다. 특히 타점과 득점은 1개차로 타이틀 홀더에 실패했고 홈런은 5개로 2위를 기록했는데 시즌초 상무 복무와의 중복으로 인해 출장하지 못한 경기와 시즌 막판 김성래와 함께 출장하지 못한 2경기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시즌 막판 만약이라는 단서하에 2위를 기록했던 타이틀에서 조금만 더 분발을 했다면 사상 유례가 없는 트리플크라운에 이은 장타율, 출루율, 득점까지 6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을 것이고 신인 최초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기록 속에 아쉬웠던 그림자 MVP, 골든글러브

통산 3회의 우승반지와, 이만수와 함께 역대 최다인 올스타전 4회의 최다 득표, 장효조와 타이기록인 최다 타격왕 4회, 그리고 각종 타이틀 홀더를 기록했고 통산 기록에 있어서는 홈런, 타점, 안타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기록을 독식하고 있는 양준혁이지만 그의 기록 속에 아쉬움이 있다면 리그 MVP를 들 수 있다. 매년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고배를 마시곤 했는데 1993년 역시 아쉬움이 깊은 한 해였다. 신인왕은 물론이거니와 MVP까지 노릴 수 있을 만한 성적이었지만 홈런왕=MVP라는 그 동안의 선례와 신인왕과 MVP의 동시 수상이라는 거부감이 작용한 것이 뼈아팠다. 그리고 MVP와의 악연이 17년 동안 이어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골든글러브 역시 한대화와 함께 최다인 8회 수상을 기록하고 있지만 1993년의 경우 그렇게 대단한 기록을 내고서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땅을 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당시 구단에서 MVP 수상자인 김성래와 동일한 1루수 후보로 내세웠고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2명의 대형 후보가 대결한 1루수 골든글러브에서 MVP 김성래에게 몰표가 쏟아지는 바람에 결국 골든글러브 수상을 놓치고 만다.

최고의 타자 신인왕 양준혁

한국프로야구는 28년 역사 이래 12명의 타자 신인왕을 배출했다. 이런 사실은 그만큼 타자가 투수보다 1군에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양준혁은 박재홍이 데뷔하기 전까지 타자 신인왕 중에서도 독보적인 성적으로 데뷔 해를 장식했다. 그리고 ‘너무 신인 같지 않아 신인왕을 줄 수 없다’ 하여 어이없이 신인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던 대구상원고 선배인 장효조와 함께 신인으로서 타율, 장타율, 출루율, OPS 1위를 기록했고 이 네 가지 기록(타율, 장타율, 출루율, OPS)은 이 두 선수 외에는 아직까지 어떤 신인도 획득하지 못한 타이틀이다(2001년도의 한화 김태균은 규정 타석 미달이었음). 양준혁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30-30클럽을 기록한 박재홍과 함께 데뷔년도에 MVP급의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남겼다.

전설은 계속된다

2007년 한국 프로야구 최초 2천 안타와 더불어 2009년에 장종훈의 340홈런을 뛰어넘으며 기록의 최정점에 오른 양준혁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양준혁은 외야와 내야 그리고 지명타자까지 세 부문에서 최다인 8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한대화 한화 감독과 같은 최다 수상을 기록하고 있고 올스타전에서도 최다인 12회 베스트 선정 그리고 최다 팬투표 4회를 기록하며 실력과 인기를 두루 갖춘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산 최다 타수, 득점, 안타, 홈런, 타점, 사사구 등 도루를 제외하고 타자가 기록할 수 있는 모든 부문에서 그는 자신의 기록을 세워가며 살아 있는 전설로 거듭나고 있다.

 

참조 : 야구천재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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